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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세 웰링턴 피터스 목사] 일제시대 한국에 감리교 씨앗 뿌려

"한반도 통일이 내 마지막 기도입니다." 북쪽에 가족을 두고온 실향민의 소원으로 들리지만 한국을 잊지 못하는 백인 선교사의 바람이다. 지난 9월 29일 108세를 맞은 웰링턴 피터스 목사. 패서디나 고향집에 사는 그를 찾아간 50년 지기 김영철 목사로부터 그의 인생을 전해들었다. 이름을 피도수(皮道秀)로 바꿔가면서까지 한국 복음화에 노력했던 피터스 목사의 삶이 쏟아졌다. 피도수 선교사는 1928년 감리교단 소속으로 한국 땅을 밟은 파란눈의 선교사다. 1941년까지 서울 개성 강원도 지역에 교회를 세우다가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13년을 보낸 타국 그것도 69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여전히 피터스 목사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여전히 김치콩나물국과 된장국을 가장 좋아하고 떡과 식혜 약식 선물에 반색한다. 고령이라 듣고 말하기가 불편하지만 여전히 한국어를 또박또박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고 쓸 정도다. 72년전 그가 한국행을 선택한 계기는 '계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꿈속에서 'Korea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전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국가명이었다. 일본 식민지 아래 있는 가난한 나라로 여타 선교사들이 파송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고는 오히려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향했다. 위험하고 낯선 땅에서 그는 부던히도 한국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8개월만에 대화가 될 수준의 한국어를 익혔다. 또 항상 한복을 입었고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궁정동 양촌 벽돌집을 마다하고 초가집 교회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자기 헌신이었다. 그림에 뛰어났던 재능을 살려 성서속 인물들을 한국사람의 모습으로 그려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그림은 300여점에 달한다. 한국 여성과 결혼도 했다. 1938년 이화여전 졸업생 한흥복 여사로 11년전 간암으로 별세하기까지 60년간 해로했다. 교계에서는 한국 최초의 국제결혼이라고 한다. 그의 한국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기독교를 탄압하던 일본 경찰들이 '서양사람'이라고 자신을 칭하자 "나는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13년간 그가 한국 땅에 남긴 복음은 한국감리교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 감리교 신학교 박물관에는 그의 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 한국 교계가 세속화되고 있는 것 같지 않느냐는 물음에 피도수 목사는 "죄송하다"며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백인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 교계의 원로로서의 책임감 때문이란다. 그에게 13년간의 한국은 추억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고향이다. 정리=정구현 기자

2010-11-09

[탄자니아 선교사 안명찬씨]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오지를 택한 선교사들은 왜 하필 거기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답변이 같다. 17년째 탄자니아에서 사역중인 안명찬(53) 선교사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고생길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안 선교사는 지난 93년 총회세계선교회(GMS)를 통해 파송돼 탄자니아의 '도도마'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오지인 선교지에서의 생활을 그는 "신석기 시대'에 사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식수난과 생필품 부족 풍토병은 일상이었다. 안 선교사는 "큰 딸이 장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릴 때도 아내가 아파 움직이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고 고충을 전했다. 9.11 테러 후 투옥되기도 했다. 사역지를 벗어나 선교를 한다는 이유로 이민성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안 선교사는 "양말과 신발이 벗겨진 채 끌려가던 당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며 "지하 감옥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던 한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가 만든 교회가 4개 들어섰고 올해 5월에는 미국 컴패션 후원을 받아 학교도 설립했다. 안 선교사는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으라면 내 어눌한 스와힐리어 설교에 현지인들이 감동할 때였다"며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보람은 모든 어려움을 뒤로 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안식년 기간으로 잠시 아프리카를 떠나 LA에 머물고 있다. ▶도움 주실 분:philmcahn@gmail.com 정구현 기자

2010-11-09

[베트남 선교사 장요나 씨] 6번 투옥 당하고도 11개 병원 설립

베트남에서 '한국인 언더우드'로 잘 알려진 장요나(67) 선교사가 LA를 찾았다. 장 선교사의 베트남 선교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1989년 베트남이 강력한 공산주의를 주창하던 시기 그는 베트남을 선교지로 택했다. 장 선교사는 "당시엔 선교자체가 불가능했고 한국과 수교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어려움이 컸다"며 "한 번은 예전 교회가 있던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선교 초기에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올해로 21년째인 선교기간 동안 총 6번의 투옥생활은 그의 왼쪽 시력과 무릎 연골을 빼앗아갔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베트남 선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 선교사는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고 말한다. 한 때 한국 굴지의 대기업 기획실장으로 활약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처럼 일어났다. 의사도 사실상 사망 판정을 내렸지만 10개월이 뒤 그는 깨어났다. 코마 상태에서 벗어난 뒤 선교에 대한 결심을 하게 됐고 자신의 이름도 성경속 인물 '요나'로 바꿨다. 베트남에서 시작한 의료사역은 지역주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현재는 11곳의 현지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료사역의 효과는 복음화로 이어졌다. 예배조차 힘들었던 교회는 베트남에만 157개가 뿌리를 내렸고 선교 전문화를 위한 신학교는 올해로 8번째 졸업생을 배출하며 500여명의 현지선교자들을 배출했다. 지난 2008년에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이상배 기자

2010-11-09

"힘들어도 복음은 전파" 선교사 파송 계속 증가

한국세계선교협 조사 1903년 오늘(11월10일) 하와이에서 미주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인 한인감리교선교회가 탄생했다. 1884년 6월29일 황해도 장연에 한국 최초의 초가집 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진지 19년만에 태평양 건너 미주에까지 한인들만의 자생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일본 식민지 아래 밟히고 뽑히기 쉬운 새싹에 불과했던 한ㆍ미 한인 교회에 물과 거름을 준 이들은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다. 당시의 영양분은 미주 첫 교회 탄생 107년을 맞은 오늘 한인 선교사들에 의해 고스란히 전세계로 전달되고 있다. 북미주와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현황을 조사했다. 한국은 올해 '해외 파송 선교사 2만명 시대'를 맞았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각 교단선교부와 선교단체들을 대상으로 선교사 파송 현황을 조사한 결과 2010년 1월 현재 169개국에 총 2만 445명을 파송한 것으로 집계됐다. KWMA가 선교사 파송 현황을 조사하기 시작한 지난 1998년 이래 2만 명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04년 1만2159명에서 2010년 1월 현재 2만1735명으로 6년만에 78%(9576명) 증가했다. 지난해에 비해서는 1232명이 늘었다. 매년 1000명 이상씩 꾸준히 증가해온 셈이다. 북미 지역 선교사수는 885명으로 따로 분류됐다. 보고가 되지 않은 선교사수를 포함한다면 북미에서 파송된 한인 선교사는 1000명 이상일 것으로 분석됐다. KWMA측은 예년에 비해 증가폭은 다소 둔화됐지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속에서도 선교사수가 늘어난 것은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교회와 선교단체 파송 비율은 각각 42:58로 조사됐다. 한국교회 96개 교단에서 9063명을 보냈고 229개 선교단체에서 1만2672명을 파송했다. 배우자를 포함한 교역자와 평신도의 전체 평균은 66:34로 전년도와 같았다. 2008년에 비해 교역자는 1102명 평신도는 525명이 증가했다. 기간별로는 2008년 장기 선교사(3년 이상)보다 1769명 증가했고 6개월 이상 3년 이하 단기 선교사는 1311명으로 2008년보다 133명 감소돼 장기 선교사의 비중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교사의 장기와 단기의 전체 비율이 93:7이었는데 교단은 장.단기 비율이 88:12였고 선교단체는 95:5였다. 성별로는 여성선교사가 남성선교사보다 계속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KWMA는 "2009년에는 2008년보다 여선교사는 780명 남선교사는 847명이 증가했다"면서 "교단의 남녀비율은 49:51이고 선교단체의 남녀 비율이 45:55로 교단보다 선교단체에서 여자 선교사들이 더 많이 파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체 남녀 선교사 비율은 47:53으로 여 선교사의 비중이 약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09년도에는 부부선교사는 1만8366명이고 독신선교사는 3764명으로 비율은 83:17이였다. 선교사가 늘면서 미셔너리 키즈(MK)로 불리는 자녀수도 2004년 5961명에서 지난해 1만3868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정구현.이상배 기자

201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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